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화단 운동 (문단 편집) === [[청나라]]의 선전포고 === [[청나라]]의 태도와 [[의화단]]의 만행에 [[영국]] 등 열강들은 자체적으로라도 병력을 동원해 의화단을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시모어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병력을 [[베이징]]으로 이동시키려고 했다. 그러나 청나라는 군을 동원해 이들이 베이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고 청의 조정에서는 회의 끝에 서양과 강화하자는 [[광서제]]의 의견을 묵살하고 '''[[서태후]]가 의화단과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'''.[* 서태후는 당시 광서제를 폐위하고 [[아이신기오로 푸쥔]]을 새로운 황제로 세우려 하였는데, 열강의 의화단 진압 병력이 광서제를 돕기 위해 왔다는 소문을 듣고 의화단과 손을 잡기로 한다.] 이 때 광서제는 [[변법자강운동]]의 실패 이후 실권 없는 허수아비였다. [[청나라]] 조정은 [[1900년]] [[6월 21일]] 서양과 전쟁상태에 들어갔음을 포고했다. 선전포고의 양식이 결정된 것은 [[1907년]] 개전에 관한 협약 이후이고 이전에는 관습법상 국내건 국외건 전쟁을 벌이는 포고 행위만으로도 선전포고로 간주되었다. [[1900년]] [[6월 21일]]에 내려진 선전조서는 국제법상 de facto declaration of war에 해당하며 국제법상으로는 이것도 선전포고로 간주된다. 광서제는 베이징에 있는 외국인 지역을 포위한 후 이미 의화단의 대규모 무장폭동이 일어난 텐진에서 안전을 위해 24시간 이내에 떠나라고 권고했다. [[독일 제국]] 공사 클레멘스 폰 케텔러는 이에 항의하러 가다가 [[만주족]]인 엔 하이가 지휘하는 의화단 무리의 공격을 받고 살해당했다.[* 엔 하이는 [[식인|케텔러의 가죽을 벗기고 그의 심장을 먹었다고]] 한다. [[의화단]]이 진압된 후 그는 [[독일 제국군]]에게 잡혀 [[참수형]]에 처해졌다.] 이에 독일 공사관을 경비하던 [[독일 제국 해군]]의 해군 보병들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청나라 외무아문(외교부)에 쳐들어가 기물을 파손하고 공무원들을 잡아 단체로 린치를 가했다고 한다. 또 일본 공사관의 스기야마 아키라 서기도 의화단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. 한편 [[베이징]]에서도 의화단이 일어났고 외국인들은 안전을 위해 외국인 지구로 도망쳐 약 4,000여명이 외국인 지구에 갇히게 되었다. 청나라 정부는 자신들의 군대로 호위해서 [[톈진]]으로 보내 주겠다고 했으나 안전을 우려한 외국인 지구 측에서 이를 거부했다. 청나라 정부는 이들에게 음식 등 기본물자를 제공했다. 외국인 지구로 피신한 사람들에 대한 공격은 중단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